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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Gray의 팜

성공한 아베노믹스, 그리고 다카하시 코레키요

Mr Gray

2015.06.14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보고와 리서치를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몇년간 아저씨 몇분들이 밀던 음모론 (공부와 리서치는 담쌓고 신문도 잘 안 봄)

 

1. 중국에 곧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2. 아베노믹스는 필히 실패한다

 

아마 아직도 저렇게 우기고 있을 듯...

 

언젠가는 금융위기가 오겠지만 중국경제는 몇년째 안정적으로 연착륙 중이며

중국증시는 2014년부터 세계 제일의 수익률을 자랑하고 있다. 

규제가 풀리고 더 많은 버블이 키워진다면 언젠가 위기가 오겠으나... 아직은 좀 더 갈 것이고

 

아베노믹스도 2012년말부터.. 2013년 4월 본격적인 QQE를 시작했으니..

2년반 넘게 순항중이라고 봐야지. 일본이 한국보다 높은 성장을 하고 증시도 치솟고

자산가격이 상승하고... 취업도 더 잘되는 이 마당에...

물론 언젠가 여기도 고꾸라질 수 있겠으나

3년째 건실하게 성장하는 일본경제를 보고 아베노믹스가 실패했다고 하면 그건 뭔 까막눈...

 

여튼 AWJ에 나온 기사를 보고

 

http://www.wsj.com/articles/as-japan-battles-deflation-a-bitter-legacy-looms-1434011826?KEYWORDS=japan

 

친구가 전에 올렸던 다카하시 코레키요에 대해 쓴 글을 기록 저장 차원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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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카하시고레키요(高橋是清)

 

‘경제대통령들’에 동아시아인은 두 명이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중국의 주룽지총리이고 다른 한 사람이 이 글의 주인공인 일본의 다카하시고레키요(1854~1936) 대장대신(한국의 기재부장관에 해당)이다.

다카하시는 일본 개화기 역사의 드라마 주인공같은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책의 소개에 의하면 그는 막부 말기 어용화가와 그의 하녀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서자였던 그는 최하급 무사 다카하시의 양자로 보내져 그의 성은 다카하시가 되었다. 13세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으나 노예와 다름없는 일을 하다가 1년 반 후 일본으로 돌아온다.

젊은 시절 고생 끝에 영어를 익힌 다카하시의 인생은 1892년 일본은행에 취직한 이후 출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결정적인 전환점은 바로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이다.

우리 또래 친구들이 좋아하는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에 보면 주인공 양이 입을 통하여 다나카는 전쟁은 보급이 생명이라는 요지의 생각을 피력한다. 현대에 와서 보급은 다른 말로 하면 돈, 즉 전비조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전비로 약 170억 엔을 쓰게 되는데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80억 엔을 당시의 기축통화인 파운드화표시채권으로 8,200만 파운드를 런던에서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이 외화표시일본국채를 20세기 초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써 자본주의의 심장역할을 하던 런던에서 발행하는 역할을 바로 다카하시가 맡게 된다.

초기 외화표시채권발행은 세계에서 무명에 가까운 일본에게는 쉽지 않았으나 미국 은행가 쉬프(Schiff)의 도움으로 1904년 5월 3일 처음으로 1,000만 파운드를 발행하는데 성공한다. 초기 일본국채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투자은행에서 인수를 했으며 전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채권발행은 점차 수월해져갔다. 채권발행으로 마련한 돈 중 상당액은 런던은행계좌를 떠나지 않고 명의만 수차례 변경되었다.

전쟁의 당사국은 일본이었으나 러일전쟁은 어떻게 보면 영국과 러시아의 세계패권경쟁의 한 부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런던에서 국채를 발행하여 영국자본가에게 빌린 돈으로 다시 영국 자본가들이 투자하여 만든 전함을 구매하여 러시아해군과의 해전을 준비했다.

당시 러시아는 해상 결전을 위해 무려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발트해 함대까지도 지구 3분의 2 바퀴를 6개월간 이동시켜 한반도 남해안에서 일본 해군과 맞서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런 어리석은 전략을 펼친 러시아는 동해의 기항인 블라디보스톡에 보급을 위해 가던 도중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해군에게 힘도 한 번 못 써보고 1905년 5월 말 쓰시마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완패를 하게 된다.

쓰시마해전으로 승자와 패자가 명확해진 러시아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회담에서 러시아는 조선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일본은 당시의 관례와도 같은 전쟁배상금을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없었다.

20세기 초 세계질서는 철저히 열강들의 이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가장 선두에 있던 영국은 19세기부터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을 국제관계의 기조로 삶고 있었다. 영광스런 고립이란 전세계 공업생산의 절반을 담당하고, 전세계 전함의 절반 정도를 영국이 보유하던 시절의 정책으로 프랑스나 독일 같은 경쟁국들의 전력을 합한 것보다 더 나은 군사력 혹은 제2의 군사대국으로 올라선 독일보다 2배의 해군전력을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너무 많은 전선이 펼쳐졌고, 후발공업국의 추격에 버거워하던 영국은 각 지역의 파트너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할 동아시아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고, 일본과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확립하였다.

영국으로서는 일본이 러시아를 적절한 수준으로 이겨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에 일본은 부응하였고 전리품으로 조선과 만주를 가져갈 수 있었지만 영국에 갚아야 할 전쟁부채를 러시아로 넘기지는 못하였다.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갚아야 할 빚만 남은 일본정부는 조선을 통해 자국의 경제문제로 인한 긴장을 상당히 완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보면 김제 만경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이 쌀은 새롭게 형성된 도시 일본노동자계층의 주식으로 쓰여 전후에 흔히 나타나는 생필품 품귀로 인한 물가인상압력을 다소 완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러일전쟁이후 다카하시고레키요는 1930년대 대공황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하여 일본의 케인즈가 되어 일본 경제를 구한다.

대공황의 한 가운데를 지나던 1931년 말 다카하시는 대장대신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후 바로 금본위제를 탈퇴하여 엔화의 가치를 40%가량 인하시켰다. 또한 중앙은행의 창구금리를 5~6%수준에서 3%수준으로 낮춤과 동시에 GNP대비 6%수준의 적자재정을 편성하여 교과서적인 케인지언 경제정책을 통하여 대공황에 대응했다.

케인즈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일반이론’이 출간되기도 전에 케인지언 경제정책을 가장 먼저 수용한 사람은 일본의 다카하시와 스웨덴의 비그포르스다. 비그포르스에 관한 이야기는 신정완의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와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에 잘 나와 있으니 그 두 책을 참고하면 된다.

비그포르스의 케인지언식 경제운용은 스웨덴 사민당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주었고, 비그포르스를 스웨덴 사민당 역사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들 중 하나로 만들어 주었으나 다카하시의 인생은 그보다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6년 2월 26일 일본제국 청년장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 각료 중 몇 명을 살해하나 정변은 실패하고 만다. 불행히도 그날 새벽 81세의 다카하시는 자택에서 청년 장교들의 총탄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다카하시와 관련하여 책에 있는 사진 중 의미 있는 사진이 있다.
1935년 아사히신문이 80세를 넘긴 다카하시를 찍은 사진인데 화제가 된 것은 사진에서 다카하시가 읽고 있는 책이 영국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핵심 사상가인 웹 부부(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가 당시 막 출간한 ‘소련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인가?’의 영어 원서였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죽음이 있은 지 5년 후 일본은 진주만공습으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만약 다카하시가 살아있었다면 자국의 제 1수출국과의 전쟁이 국가적 자살행위임을 주장했을 것이다. 극우가 득세하던 일본에서 이런 상식은 비상식이되어 버렸고 극단은 결국 모두의 파멸을 초래하였다.

역사에서 극단적 세력은 언제나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은 1940년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20년 후 중국 문화혁명과정에서도 사실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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