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다르게 보는 IMF 외환위기 이야기
메르
2024.12.26
직장생활썰로 시작하는 카드사태 이야기 1 : 네이버 블로그
주절주절글을 번호로 쓰기는 처음인듯하네요. 개인적인 글이 정보글로 연결되어서 그렇습니다. 1. 신입사원...
직장생활썰로 시작하는 카드사태 이야기 2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ranto28/223704331721 1편에 이어서 계속 50. 이런 분위기에서 추가적인 불쏘시...
카드사태 이야기를 하다보니, IMF외환위기가 언급되었다.
IMF외환위기는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IMF외환위기는 부분적으로 정리한 적이 있는데, 종합해서 정리하고 빠진 부분을 채워본다.
1. 80년대 말 중국에 자유의 바람이 불게 됨.
2. 학생시위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고, 천안문 광장까지 시위대가 점령을 함.
3. 피를 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에서 인민을 학살했고, 리펑이 총대를 멤
4. 리펑은 중국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다음번 주석이 유력한 인물이었음.
5. 유혈진압으로 시위는 해결했지만, 천안문에서 많은 피가 흘렀음.
6.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 집권층은 시위를 진두지휘해서 진압한 리펑을 중국 개방개혁의 얼굴로 내세우기에 문제가 있다고 봄.
7. 천안문 피가 묻지 않았고, 중앙에 파벌이 없는 장쩌민을 후계자로 세우고, 리펑이 총리를 맡아 실권을 행사하는 구도가 다시 짜여짐.
8. 듣보잡 상하이 시장 장쩌민이 국가 주석에 오르게 된 것임.
9. 장쩌민이 주석자리에 올랐지만, 집권 초기에는 힘을 쓸 수 없었음.
10. 리펑이라는 실세가 있었고, 덩샤오핑도 힘이 짱짱했기때문임.
11.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경제이론을 실현하고, 본인의 본거지인 상하이를 중심으로 개발을 확대하며 힘을 키우려고 함
12. 덩샤오핑이 주장하던 경제이론은 선부론이었음
13. 선부론은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면, 낙수효과가 생겨서 결국 전체가 다 잘 살 것이라는 이론이었음
14. 전체가 다 잘 살게 된다는 것이 공동부유로, 선부론에서 공동부유로 정책이 이어지는 것은 덩샤오핑이 주장한 내용임.
15. 선부론은 자원을 선택적으로 집중하자는 말이었고, 장쩌민의 본거지인 상하이 등 남부 해안도시들을 집중적으로 키우기 시작함.
16. 해안 도시를 키우는 방법은 수출 확대로 방향을 잡음
17. 그 당시 중국은 노동집약적 상품밖에 만들 수 없었고,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과 가격 경쟁을 하고 있었음.
18. 1994년 1월 중국은 환율을 크게 건드림.
19. 시장환율과 고시환율을 일치시킨다는 명분으로 달러당 5.8위안을 8.6위안으로 일시에 바꿔버린 것임.
20. 한국으로 보면, 1450원의 환율을 하루만에 2150원으로 변경한 것과 같음.
21. 환율이 5.8위안에서 8.6위안이 되었다는 말은 중국 제품의 가격이 40% 싸졌다는 말임
22. 상품의 품질이 떨어져서, 낮은 가격으로 승부하던 중국에게 커다란 가격경쟁력이 하루만에 생기게 된 것임.
23. 중국은 수출이 빠르게 증가하며 본격적인 경제성장이 시작됨.
24. 문제는 중국과 가격경쟁을 하던 동남아 국가들이었음.
25. 가격경쟁이 불가능해서 수출이 힘들어지자, 동남아 국가들은 바로 그해부터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며 달러가 마르기 시작함
26. 당시 태국은 환율을 하나로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를 하고 있었음.
27. 태국은 무역수지 적자로 달러는 부족한데, 얼마 없는 달러를 고정환율제 유지를 위한 환율 방어에 소모하고 있었음.
28. 태국등 동남아에 달러가 마르고 있다는 약점을 알아차린 헤지펀드들은 팀을 꾸리기 시작함.
29. 이때 한국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섬.
30. 1994년, 김영삼정부는 금융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지하경제였던 사채업자들을 양성화시키게 됨.
31. 사채업자들이 운영한 24개 단자회사를 종합금융사로 전환시킨 것임.
32. 기존 6개 종금사 체제에 24개 종금사가 한번에 추가되며 30개 종금사가 되자 종금사가 먹고 살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해짐
33. 사채업이 본업이었던 신설 종금사들에게 외화대출을 풀어주게 됨.
34. 외화대출을 풀어주자, 신설 종금사들은 주로 일본에서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서 대기업에게 비싸게 빌려주며 돈을 벌기 시작함.
35. 5%로 해외자금을 빌려와서 10%로 대출을 해주면, 큰 수익을 종금사가 먹을 수 있었음.
36. 한두군데 신설 종금사가 시작한 엔화대출등에 대부분 종금사가 뛰어들자, 대출 경쟁이 심해지며 종금사들의 마진이 박해지게 됨.
37. 종금사들은 수익을 더 높이기위해 자금을 단기로 빌려오기 시작함.
38. 대출금리는 기간이 짧을수록 낮고, 기간이 길면 가산금리가 붙어서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임.
39. 종금사가 단기로 빌려와서 장기로 빌려주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함.
40. 당시, 일본은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 투자를 확대하던 시기였음.
41.약점을 발견한 헤지펀드들이 모이기 시작함.
42. 첫번째 타깃은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패배해서 무역수자가 적자로 전환된 태국이었음.
43. 헤지펀드들은 태국 바트화를 공매도하며 고정환율제를 공격하기 시작함.
44. 태국정부는 버티지 못했고, 1997년 7월 2일 GG를 치고 변동환율제를 수용하게 됨.
45. 변동환율제로 바꾸자 바트화는 폭락했고, 헤지펀드들은 막대한 환차익을 먹고 태국을 떠나게 됨.
46.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헤지펀드는 그중에서도 욕심의 끝판왕인 존재들임.
47. 태국에서 먹은 이익에 만족하지 못한 헤지펀드들은 다음 타깃을 홍콩으로 잡게 됨.
48. 당시 홍콩은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였음.
49. 미국 달러와 7.7대 1의 고정환율을 운용하는 홍콩을 무너뜨리면, 이익의 크기가 동남아와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임.
50. 영국 통치하에서 금융에 대한 역량을 쌓아온 홍콩당국은 헤지펀드가 홍콩 달러를 공격하자 헤지펀드의 약점을 파고 들게 됨.
51. 헤지펀드들은 자기자금의 몇배를 단기로 빌려서 투자를 하기때문에 장기전에 약점이 있었음.
52. 당시 헤지펀드들은 홍콩 금융권에서 6%대 금리의 단기 자금을 빌려서 홍콩 달러를 공격하고 있었음.
53. 1997년 10월 23일, 홍콩 통화국은 홍콩은행간 금리(Hibor)를 6%에서 300%로 50배를 올려버림.
54. 홍콩 증시도 반토막이 났지만, 헤지펀드들도 연 300%의 금리를 감당할 수 없자, 홍콩에서 손절을 치게됨.
55. 헤지펀드들을 공격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홍콩증시는 두달만에 반토막이 나게 됨.
56. 홍콩증시의 급락에 정상적으로 홍콩에 투자했던 미국의 펀드들도 큰 손실을 보게 됨.
57. 1997년 10월 27일은 월요일 이었음.
58. 펀드들은 홍콩에서 물린 돈을 갚기 위해 미국 주식을 대량 투매하기 시작함.
59. 당시 미국증시는 다우존스 지수가 150포인트 이상 하락하면 주식 거래를 30분간 정지하도록 되어 있었음.
60. 97년 10월 27일 미장은 주식 거래가 2번이나 정지되었고, 10년중 가장 큰 폭인 554포인트(7.2%)가 폭락하게 됨.
61. 홍콩에서 큰 피해를 본 헤지펀드들은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음.
62.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등 동남아와 한국으로 방향을 돌림.
63. 당시 대만,말레이시아,필리핀,인도네시아등 동남아 각국은 중국의 환율 조작으로 가격 경쟁을 할 수 없어 수출이 힘들던 시기 였음.
64. 수출이 안되니 달러가 부족한데, 헤지펀드의 공격으로 환율까지 망가지니 부실이 터지기 시작함.
65. 동남아 기업들의 부실이 터지자, 동남아에 투자를 많이했던 일본 야마이치 증권, 탁쇼쿠은행 등 일본 금융기관들의 파산이 시작됨.
66. 일본 금융기관들이 해외투자 손실로 도산하기 시작하자 일본 금융감독국은 미국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요청함.
67. 이때 일본 금융감독국에 대책을 제시한 사람이 폴 볼커였음.
68. 폴 볼커가 제안한 대책은 일본은행에 BIS 비율을 도입하라는 것이었음.
69. 은행의 자본 비율을 높여서, 위기에도 버틸수 있는 안전성을 높이는 대책이 채택되었고, 금융감독국 주도로 실행되기 시작함.
70. BIS비율을 높이는 것은 자본을 늘리는것이 올바른 방법임.
71. 금융감독국은 BIS비율을 높이라고 하는데, 갑자기 자본을 늘릴 수 없는 일본은행들은 대출을 회수하며 비율을 맞추기 시작함.
72. 분자를 늘릴수 없으니, 분모를 줄인 것임.
73. 대출을 회수하자 만기연장이 힘들어졌고, 낮은 이자율로 빌리기위해 단기대출로 받아간 한국 종금사에 상환 요구가 집중되기 시작함.
74. 일본은행들이 만기연장을 해주지않자, 종금사들은 한국 기업들에게 빌려줬던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함.
75. 그 당시 한국 대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이 500%를 넘어 현금이 부족한 상황이라, 종금사의 대출 회수에 대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함
76. 만기가 돌아오는대로 속속 회수를 했지만, 단기로 빌려와서 장기로 빌려주다보니 종금사도 자금부족사태를 겪기 시작함.
77. 종금사가 부도날 것 같다는 소문이 시장에 돌기 시작함.
78. 돈을 못받을까 걱정이 든 종금사 예금주들은 종금사에 몰려와 예금을 인출해가기 시작함.
79. 정부에서 예금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준다고 했지만, 단 3일간 전체 종금사 개인 예금의 40%인 1.1조가 인출됨.
80. 결국, 30개 종금사중 29개 종금사가 시차를 두고 무너지게됨.
81. 한국에 들어온 해외자금이 종금사등에게 상환 받은 돈을 달러로 바꿔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한국도 달러가 마르기 시작함.
82. 한국 역시 태국과 마찬가지로 고정환율제를 하고 있었음.
83. 정부는 1997년 10월~ 11월 두달동안 외환시장에 118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달러가 바닥나기 시작함.
84.1997년 11월 20일, 오후 10시 20분 한국은 IMF 구제금융 요청을 발표하게 됨.
85. 20일 오전까지도 250억 달러가 남아있다고 했던 외환보유고는 저녁 10시20분 발표때는 30억달러도 남아있지 않은것으로 밝혀짐.
86. 1997년 12월 19일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 주재로 국가 안보회의가 열리게 됨.
87. 회의의 주제는 한국 외채 문제였음.
88.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루빈은 한국이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더라도 어쩔수 없다고 주장했음.
89. 국방장관이었던 코언이 다음과 같은 반대의견을 제시함.
"한국은 수만명의 미군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총을 겨루고 있는 나라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풀어가야 한다"
90. 코언 국방장관의 주장이 채택됨.
91. 미 정부도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을 조기에 재개하는데 동의를 한 것임.
92. 이미 한국은 변동환율제를 수용했고, 달러당 800원이었던 환율이 12월 23일 1,960원까지 올라갔던 상황이었음.
93.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IMF와 미국등 G7국가들이 자금을 조기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함.
94. 1,960원까지 올라갔던 환율이 1,498원으로 마감되며 안정세로 돌아서게 됨.
95. 그린스펀의 자서전 격동의 시대를 보면, 이들의 지원은 한국을 위한 것은 아니었음.
"한국이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 국제시장이 위태로와지고, 일본이나 다른 국가의 주요 은행시스템으로 여파가 퍼지면 이들도 파산할 가능성이 높았다"
96. IMF는 한국에 550억 달러의 자금을 승인했지만, 한국은 195억 달러만 가져다 썼고, 4년만에 다 갚은 뒤 IMF를 졸업하게 됨.
97. 빌린돈은 갚았지만, 한국은 큰 대가를 치름.
98. 대우그룹이 공중분해 되며 대우자동차가 GM으로 넘어갔고, 삼성그룹의 굴삭기가 볼보에, 포크리프트 부문이 클라크에, 화학부분은 듀퐁, 석유화학 부분은 아모코에 넘어감.
99. 두산음료는 코카콜라에, 오비맥주는 인터브류에 넘어가는등 쓸만한 한국기업들이 외국 자금에 줍줍 쇼핑을 당하게 됨.
100. 동남아와 한국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헤지펀드들은 1차 공격에 실패했던 홍콩에 2차 공격을 재개함.
101. 이번에는 환율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홍콩증시에 엄청난 공매도를 쏟아붓는 식으로 방법을 바꿈
102. 홍콩 항셍지수는 3만 포인트에서 98년 6,600포인트로 급락하며 헤지펀드들이 성공하는것으로 보였음.
103. 홍콩은 외화보유고를 주식시장과 선물시장에 투입해서 헤지펀드들이 매도한 주식과 선물 물량을 모두 받아내 버림.
104. 헤지펀드들은 공격 목표를 홍콩 증시에서 홍콩 달러화로 바꾸고 홍콩 달러화 투매를 하면서 공세를 재개함.
105. 홍콩 금융당국은 헤지펀드들이 투매하는 홍콩 달러화를 모두 사들이며 홍콩 달러화와 미국 달러화의 7.7 대 1 비율을 유지함.
106. 홍콩의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변경시키지 못한 헤지펀드들은 홍콩 2차 공격 한 달 만에 700억 불의 손해를 보게 됨.
106. 헤지펀드들은 한국과 동남아에서 먹었던 이익을 모두 토해내고 홍콩에서 철수하게 됨.
107. 홍콩 역시 주식과 외환시장에서 1,450억 달러를 소모하는 피해를 보며 동남아 외환위기는 마무리가 됨
한줄 코멘트. 과거는 무조건 반복하는것이 아님. 하지만, 과거의 사례들을 공부하면 도움이 되는 지점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음. 1990년대에는 홍콩이 아시아 금융의 허브이자 방파제 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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