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의 팜
일본 초대형 지진과 부산항 이야기(feat 베트남 전쟁)
메르
2024.08.12
일본 지진이 이슈가 되고 있어 다듬어서 재업해 봅니다.
1. 1955년,남베트남과 북베트남간의 내전이 일어남.
2. 소련과 냉전을 치르던 미국은 공산권의 지원을 받는 북베트남으로 베트남이 통일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
3. 미국이 직접 북베트남과 전쟁을 하면 소련도 참전할 수 있어서, 남베트남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쪽으로 방향을 잡음.
4.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에 공격을 받자, 물자 지원에서 직접 개입이 시작됨.
5. 당시 미군은 지금과 같은 모집병이 아니라, 숙련도가 떨어진 징집병들이 베트남에 파병되었음.
6. 한국전에서 미군은 북한군이나 중국군을 상대로 1 대 50 이상의 교환비를 냈었음.
7. 베트남전에서는 미군은 전투에 숙련된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1 대 9의 교환비 밖에 내지 못했고,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됨.
8. 미국은 미군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포격이나 폭격을 한 후 보병을 투입하는 전술을 채택했고,엄청난 물량이 소모되기 시작함.
9. 미국은 지상군으로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고 봤었음.
10. 북베트남 영토로는 지상군을 보내지 않는 전략이 추가되자, 미군은 포격과 폭격 위주의 물량전으로 가야하는 이유가 추가됨.
11. 물량전으로 방향을 잡은 미군은 엄청난 보급물자를 베트남으로 보내기 시작함.
12. 한국도 이 점을 많이 이용함.
13. 625전쟁 때 쓰던 구식장비를 들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장비 일체를 미국 신상장비로 교체할 수 있었음.
14. 한국군은 달러로 받은 월급도 현지에서 쓰지않고 한국으로 송금하기 시작함.
15. 그당시 한국은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대대적으로 축하를 하던 시기였음.
16.1964년에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 한국에,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서 국내로 8억 7,250만 달러가 송금됨.
17. 빠른속도로 한국경제가 성장한 배경에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이 달러로 받은 월급을 쓰지않고 송금한 것도 영향을 미침.
18. 미국은 금본위제를 폐지할 정도로 막대한 물자를 베트남에 쏟아부었지만, 처음부터 이런 물량들이 공급된 것은 아니었음.
19. 미국 본토에서는 전쟁 물자를 퍼붓듯이 수송선으로 보내는데, 정작 전투 현장에는 물자가 부족한 일이 발생함.
20. 물류가 엉망이 된 게 원인이었음
21. 베트남은 철로가 해안선을 따라 이어져서 공격에 취약하고, 군데군데 끊겨 있다 보니 철도가 제대로 된 운송수단이 될 수 없었음.
22. 철로가 아니라 바다로 물자를 수송할 수밖에 없었는데, 베트남에서 수송선이 들어올 수 있는 항구는 사이공항구 하나밖에 없었음.
23. 당시 하역은 부두의 노동자들이 택배 상하차하듯 물품을 배에서 내려야 했기에 배 한척을 비우는데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음.
24. 미국에서 수송선이 사이공에 도착을 해도 물품을 배에서 내리려면 한 달씩 대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함.
25. 배에서 짐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사이공(호찌민)에서 멀리 떨어진 다낭 근처였음.
26. 전투현장까지 군수품이 가려면 두돈반 트럭으로 900킬로 가까운 이동을 해야 했던 것임.
27. 당연히 군수품 공급이 개판이 됨
28. 군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면 보통 공병이 해결을 함.
29. 미군 공병들은 “모든 배의 짐들을 통일된 포장 방식으로 보낸다 “ 는 답을 찾게 됨.
30. 통일된 포장 방식 즉 컨테이너로 물류를 수송하자는 아이디어가 채택되며, 컨테이너가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함.
31. 노스캐롤라이나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사업가 맬컴 맥린은 기발한 착상을 많이 해서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음.
32. 맥린은 배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지만, 화물을 동부 항구에서 남부까지 어떻게 하면 낮은 비용으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함.
33. 항구 인부들이 화물을 차에서 내려 배로 옮겨 싣는 것을 지루하게 기다리다, 맥린에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름.
34. 화물차에서 화물을 내리는 게 아니라, 화물차 자체를 배에 싣고 가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음.
35. 1956년 4월. 뉴어크 항구에서 맥린은 바퀴와 운전석을 떼어낸 화물차의 화물칸 58개를 유조선 위에 차곡차곡 옮겨 실었음.
36. 컨테이너의 효율성을 확인한 맥린은 "우리는 해상 운송의 경제성과 육상 운송의 속도 및 기동성을 결합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고 확신한다"라는 발표를 하고,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함.
37. 컨테이너를 처음 해양수송에 쓰기 시작한 맥린의 민간 선사가 미군의 베트남 보급을 책임지게 된 것임.
38. 컨테이너의 문제는 무게가 무거워서 지금까지 하듯이 인부의 힘으로 내릴 수가 없는 것임.
39. 컨테이너를 해상수송에 쓰려면,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내릴 수 있는 전용 항구가 필요했음.
40. 미군은 컨테이너 전용항을 찾기 시작했고, 깜라인만을 찾아 냄
41. 깜라인만은 내항 15m, 외항 30m로 동남아시아에서 수심이 가장 깊어 항공모함까지 정박이 가능한 지형이었음.
42. 깜라인만이 사이공(호찌민)보다 전투현장인 다낭에 훨씬 가깝다 보니 전장에 군수품을 공급하기에도 훨씬 나았음
43. 깜라인만을 컨테이너 전용항으로 개발하고, 배송을 컨테이너로 하자 물류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됨
44. 미군은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지만, 컨테이너로 군수품을 배송해 주는 맥린은 고민이 생김.
45. 왕복 수송비를 미군한테 다 받기는 함.
46. 하지만, 베트남으로 갈 때는 배를 꽉 채워서 가는데 미국으로 돌아올 때는 배가 텅텅 비는 게 아까운 것임.
47. 맥린은 다른 사업을 구상함.
48. 베트남까지 갔던 화물선을 그냥 텅 빈 채로 미국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일본에 들러서 상품들을 싣고 오는 사업이었음.
49. 일본이 맥린의 제안을 받아들임.
50. 고베와 요코하마를 컨테이너 항으로 만들어 빈 배를 채워줄 테니, 운송비를 싸게 해주는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됨.
51. 고베와 요코하마에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만들어짐.
52. 미국으로 가는 컨테이너 수출품 운송비가 낮아지자, 일본 상품들이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미국 가정을 공격할 수 있게 됨.
53. 수출로 일본 경제가 급성장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임.
54. 당시 한국 정부도 가만있지 않았음.
55. 일본과 미국의 교섭 사실을 파악한 한국 정부는 1974년 부산항 종합 개발 사업을 시작해서, 컨테이너 전용부두 건설에 착수함.
56. 1978년에 5만 톤 급 컨테이너 2척이 동시 하역이 가능한 컨테이너 전용항을 부산에 만듦.
57. 지금의 부산항 제5부두임.
58. 컨테이너 전용 항구로 먼저 오픈한 일본의 고베항은 1970년대 아시아 최대이자 세계 4위의 컨테이너항이자 환적항이 됨.
59. 1995년 고베 대지진이 발생함.
60. 고베항이 지진으로 망가지자, 고베의 선주들이 부산항으로 대거 이동하게 됨.
61. 부산항은 고베 대지진 이후 하루 200개 정도가 들어오던 컨테이너가 850개 수준으로 물량이 점프하며 호황이 시작됨.
62. 그런데, 부산항으로 이동한 선주들은 고베항 수리가 끝나도 대부분 복귀하지 않고 부산항에 주저앉아버리는 일이 발생함.
63. 부산은 일본보다 태풍이 훨씬 적게 오는 지리적 장점이 있었음.
64. 선주들은 이러한 지리적 장점보다 한국의 상하차에 매료가 됨.
65. 일본인 특유의 원칙적이고 매뉴얼에 따르는 꼼꼼한 상하차에 비해, 한국인 특유의 원칙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빠른 상하차가 화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것임.
66. 화주들이 주저앉아버리자, 부산항은 세계16위 항만에서 5위로 올라섰고, 고베항은 4위에서 57위로 떨어지며 경쟁에서 밀려남.
67. 맥린이 만든 시랜드 서비스는 인수합병 과정 등을 거쳐서 현재 세계 1위 해운사 머스크의 일부가 됨.
68. 부산 5부두는 가덕도에 신항이 생기면서 존재감이 많이 줄어든 상태지만, 한국 수출을 책임지던 메인 항구로 활약했었음.
한 줄 코멘트. 일본 고베지진으로 한국 부산항이 급성장을 하게 됨. 한국인의 급한 성격이 가끔은 장점이 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