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의 팜

아무도 관심 없는 방글라데시 이야기 A/S(feat 구로공단,보름달빵)

메르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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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관심 없는 방글라데시 이야기(feat 정권 퇴진,인도,파키스탄)

제 글이 늘 그렇듯이, 목적지로 직진하지 않고, 돌아돌아 갑니다. 1. 인도 대륙에는 원래 힌두 교도들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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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방글라데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이 길어지는듯해서 65~70번에서 생략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었다.

당시의 한국 상황이었다.

65.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주력이 바뀌기 시작함.

66. 인건비가 오르면서, 구로공단의 공장들은 인건비가 더 싼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함.

67. 70년대 봉제업과 의류업 대국이었던 한국이 80년대가 되며 임금이 올라가자 중국으로 공장이 넘어가게 됨.

68. 2010년이 되자 중국의 임금도 올라감.

69. 의류를 만드는 봉제업 등 수작업 비중이 높은 경공업들이 중국 임금의 1/4수준인 방글라데시 등으로 다시 이동한 것임.

70. 방글라데시는 70년대 한국의 구로공단 등에서 많이 했었던 의류 등 직물 가공업 수출을 시작하며 성장하기 시작함.

한번 언급한 에피소드지만, 보강한 부분도 있어서 수정재업해본다.

1. 1960년대 한국은 국가의 모든 역량이 수출에 집중되는 시기였음.

2.한국전쟁후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은 핵심가치를 경제성장으로 잡았고, 수출금액으로 목표를 수치화 함.

3. 생산기반이 약하고, 기술이 없는 한국의 제품 경쟁력은 가격 밖에 없었음.

4. 가격을 낮추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임금을 낮추는 것임.

5.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가발,섬유,식품,신발,전자조립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1960년대의 대표 수출산업이 됨.

6.1960년대 한국은 농업국가 였음.

7. 인구는 쑥쑥 늘어나는데, 농사지을 땅은 많지가 않아서,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이 농촌에 넘쳐나게 됨.

8. 젊은 여성들도 무엇인가 일을 해야했지만, 농촌에는 농사외에 제대로 할만한 일들이 없었음.

9. 한명이라도 입을 줄이려고, 도시를 동경해서, 자아 발전을 위해서 등등의 여러 이유로 농촌의 젊은 여성들은 도시로 상경하게 됨.

10. 노동집약적인 생산라인을 갖춘 공장이 이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음

11. 당시 공장은 최대한 낮은 임금에 많은 노동시간으로 노동력을 빼먹는 구조였음.

12. 월급제의 외형을 갖췄지만, 목표 생산량을 달성하고, 잔업과 야근을 하는 만큼 수입이 늘어나는 실적 베이스로 돌아가게 됨.

13. 생산량만큼 월급을 가져가는 구조는 오랜 근무시간과 야근,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 근무를 일반적으로 만듬.

14. 1976년 삼립식품은 보름달 빵을 출시해서 공전의 히트를 침.

15. 보름달처럼 동그란 카스텔라 두개 사이에 버터크림이 발린 빵이었음.

16. 토끼가 방아를 찧고있는포장지 그림과 "달 달 보름달 삼립빵의 보름달"이라고 시작하는 광고도 히트를 침.

17. 상대적으로 싼 가격(100원)에 양도 많아 보름달빵은 소풍갈때 사이다,김밥과 함께 필수품 취급을 받기도 함.

18. 당시 여공들은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면 간식이 나왔고, 보름달빵이 많이 나왔음.

19.여공들은 이것을 먹지않고 모으는 경우가 많았음.

20. 고향의 동생들을 생각하며, 모아서 보내려고 보관하다가, 오래 보관된 빵이 상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함.

21. 빵계가 나옴.

22. 빵이 나오는날 10명이 1명에게 순번대로 모아주면, 빵 10개를 한꺼번에 고향의 동생에게 소포로 부치는 것이었음.

23. 저녁을 먹은 뒤, 시간이 꽤 지나 출출할 야근시간에 나오는 빵을 먹지않고, 고향의 동생들에게 보내는게 드물지 않았다는 말임.

24. 당시 여공 월급이 많지않다보니, 개당 100원짜리 보름달빵도 귀한 선물 대접을 받았었음

25. 당시 여공의 80%정도는 기숙사 생활을 함.

26. 시골생활에 비하면, 난방이 되고,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온수도 나오는 기숙사는 인기가 많았음.

27. 문제는 기숙사비 부담이 컸고, 외출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 횟수 제한이 있는등 엄격하게 생활이 통제됨.

28. 회사는 탈선과 낭비, 범죄예방등을 기숙사 통제 이유라고 했지만, 여공들을 차질없이 공장에 투입하는 것이 통제의 목적 이었음.

29. 통제에 불만이 있거나, 비싼 기숙사비가 아까운 여공들은 자취를 하게 됨.

30. 5~6명이 돈을 모아서 잠만 간신히 잘 수 있는 좁은 방에서 자취하는 일명 벌집이 가장 보편적인 자취방법 이었음.

31. 문을 열면 곤로와 수도꼭지가 있는 작은 부엌이 있고, 부엌과 연결되어 좁은 방이 나왔음.

32. 벌집은 보통 2~3층에 50~100평 정도의 양옥주택이었음.

33. 겉으로는 번듯하지만, 지상과 지하 각층마다 통로에 따라 번호가 매겨진 10여개의 좁은 방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음.

​34. 벌집의 화장실은 층마다 공동으로 1~2개의 변기만 있었고, 2~3명이 간신히 잘 수 있는 방에 세입자가 6명인 경우가 많았음.

35. 24시간 쉬지않고 가동되는 수출공단의 공장들은 3교대가 많았고, 근무 시간대가 다른 여공들이 시간을 나눠 방을 쓰는 것임.

36. 당시 입사 3년차 숙련공이 기본근무외 48시간 잔업과 2일의 철야근무를 해야 5만9천원을 받았음.

37. 방1칸의 월세가 5만원정도니, 여러명이 월세를 나눠서 개인부담을 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임.

38. 4명이 동시에 자려면, 1명씩 머리방향을 반대로 한채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했고, 여공들은 자기방을 닭장이라고 부르게 됨.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39. 1976년 3월, 대통령이 공단을 시찰하며 둘러보는 과정에서 10대 여공이 대통령이 온줄도 모르고 일에 열중하고 있었음.

40. 대통령이 그 여공에게 "네 소원이 뭐냐"라는 질문을 던짐.

41. 여공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고 함.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어요“

42. 독재라고 부르는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힘에 의한 통치등 수많은 단점이 있지만, 몇가지 장점도 있음.

43. 몇가지 장점중 하나가 실행력임.

44. 1년도 안된 1977년 2월, 산업체 부설학교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그해 3월1일부터 바로 개교가 됨.

45. 1977년 시작된 산업체 부설학교는 1981년 143개(고등학교 90개, 중학교 53개)까지 확대가 됨.

46. 당시 노동청 조사에 따르면,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국졸이나 중퇴가 63%로 학력이 높지 않았음.

47. 이런 여공들에게 가장 부러운 것은 또래의 학생들 이었음.

48. 단발머리, 하얀 세일러칼라에 곱게다린 검정색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든 여학생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음.

49. 산업체부설학교가 생기면서 학교에 다니게 된 여공이 가장 먼저 한 것이 학생과 같은 단발머리로 머리를 자르는 것이었다고 함.

50. 1977년 구로공단과 영등포에 편성된 특별학급은 대방여중, 영등포여상, 영등포공고였음.

51. 주간반 여공들은 오후 5시40분 공장 일을 끝내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6시반부터 9시반까지 하루 3시간 수업을 받기 시작함.

52. 야간반 여공들은 훨씬 힘든 수업을 하게 됨.

53. 오후 9시반부터 새벽 5시반까지 공장일을 하고, 8시까지 학교에 가야했었음.

54. 졸음이 미친듯이 몰려오는 시간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음.

55. 강도높은 공장일을 한 뒤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대기업 주관이 아닌 일반적인 산업체 부설학교는 선생들의 자질도 상대적으로 낮다보니, 결석율이 높아지며 형식적인 운영만 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됨.

56.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노동집약적인 섬유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함.

© museumsvictoria, 출처 Unsplash

57.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취업하는 경우가 줄어들면서 산업체 부설학교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6년 부산의 시온식품과학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산업체 부설학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됨.

58.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주력이 바뀌기 시작함.

59. 노동집약산업들이 줄어들면서 여공들도 줄어들기 시작했고, 구로공단의 공장들은 인건비가 더 싼 방글라데시나 미얀마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함.

60.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탈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여공들이 떠나간 벌집은 두세개를 하나로 합쳐 원룸이 됨.

61. 공장과 가깝고 주거비용도 저렴한 가리봉 5거리의 주류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바뀜.

한줄 코멘트. 공순이라고 함부로 불리던 이들은, 시골집의 동생을 생각해서 허기를 참고 보름달빵을 모으던 우리의 누이들 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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