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의 팜
전세 이야기 (feat 다산 정약용, 서용보, 깡통전세, 인서울)
메르
2024.09.01
오늘 저녁 정기 업로드에 전세 이야기가 나올듯해서, 예습 차원에서 가벼운 내용으로 주절주절해봅니다.
내용이 꽤 보강되어 있습니다.
1. 조선시대 중앙관료들은 타 지역에서 일정 기간 살게 하는 귀양이라는 형벌을 많이 받았음.
2. 귀양은 고향으로 가는 귀향이 원말로, 곤장 100대를 친 후 2천 리(785km)~3천 리(1,178km) 먼 곳으로 보내는 형벌이었음.
3. 명나라 법전에서 가져와서 2~3천 리(785km~1,178km)라는 귀양 거리가 나왔는데, 조선 영토에서는 그만한 거리가 나오지 않았음.
4. 남해안이나 함경도, 제주도와 같이 한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는 정도가 됨.
5. 나이 많은 관료가 곤장 100대를 맞으면 살기 힘들다 보니, 돈을 납부해서 곤장을 면제받고 지방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6. 당시 귀양지 중 가장 험한 곳은 함경도에 있는 삼수군과 갑산군이었음.
7. 삼수군과 갑산군은 개마고원 중심부에 있어 겨울에 매우 춥고, 경작지도 별로 없어 귀양살이가 헬 난이도 지역이 됨.
8. 아주 먼 거리를 간다는 표현으로 삼수갑산 간다는 말이 나온 이유임.
9. 남해안 쪽으로도 많이 내려감.
10.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갔고, 정약전은 흑산도, 김정희와 송시열은 제주도 등으로 가게 됨.
11. 귀양은 무기징역과 마찬가지라 정약용은 18년을 강진에서 귀양살게 됨.
12. 귀양살이 원탑은 윤선도임.
13. 윤선도는 함경도 경원, 부산 기장, 경북 영덕, 함경도 삼수, 전라도 광양으로 25년을 귀양살이하며 조선시대 귀양 원탑을 찍게 됨.
14. 귀양이 시행된 초기에는 귀양이 무기징역이니 서울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생각에 서울 집을 팔고, 귀양지로 내려가는 일이 보통이었음.
15. 그런데, 임금이 바뀌거나, 임금의 화가 풀리면 귀양을 취소하고 서울로 복귀하는 일이 생각보다는 많이 생기게 됨.
16. 문제는 집이었음.
17. 조선시대에도 서울 집값이 빠르게 올랐음.
18. 귀양지에서 서울로 돌아왔는데, 귀양가면서 집을 판 돈으로 서울에 집을 다시 구하려고 하니 돈이 부족한 일이 많아짐.
19. 서울 집을 팔지 않고, 집값의 반액 내지 7~8할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귀양을 가는 일이 시작됨.
20. 이것을 전세제도의 시작으로 보고 있음.
21. 다산 정약용도 서울에서 전라남도로 귀양을 가게 됨.
22. 정약용은 고향인 남양주에서 서울로 와서 북창동에 살기 시작했음.
23. 남양주에서 살던 그가 서울에 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회현동 근처에 살던 부유한 처가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된 이유가 큼.
24. 정약용은 과거시험에서 전국 2등으로 급제를 함.
25. 이런 정약용을 보고, 서울에 살던 집안이 사윗감으로 삼고, 신혼집을 북창동에 마련해 준 것임.
26. 정약용은 북창동에서 소공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최종적으로 명동성당 근처인 명동에 정착을 하게 됨.
27. 당시 정약용을 제치고 전국 1등으로 급제를 한 사람은 서영보였음.
28. 서영보는 조선시대 학문의 최고봉이 맡는 대제학에 오르게 됨.
29. 서영보는 본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모두 대제학에 오른 시험에 능력이 몰빵한 집안이었음.
30. 지금 서영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음.
31. 역사라는 마라톤에서는 이름을 남긴 정약용이 앞선 것임.
32. 서영보와 서용보를 혼동하는 사람이 있음.
33. 서영보는 정약용의 친구이자 전국 수석인 사람이고, 서용보는 정약용을 죽을 때까지 괴롭힌 사람임.
34. 정약용은 잠깐 암행어사가 된 적이 있었음.
35. 암행어사로 경기도로 암행을 나가서, 부패한 관리 한 명에게 징계를 때림.
36. 경기 감찰사였던 관리는 징계를 받은 후에서 부활해서 승승장구하더니, 결국 영의정과 좌의정 다음의 넘버3인 우의정에 오르게 됨.
37. 그가 서용보임.
38. 서용보는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사사건건 괴롭히는 일진 역할을 하게 됨.
39. 1801년, 다산이 신유옥사로 구속되었을 때, 그는 큰 잘못이 없다고 판명이 됨.
40. 재판관들 모두 정약용을 석방하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당시 재판관 중 선임은 우의정 서용보로 그의 반대로 귀양 길을 떠나게 됨.
41. 귀양 2년 차인 1803년, 왕실의 최고 어른 정순 대비가 다산을 유배지에서 풀어주라고 했지만, 서용보가 반대해서 풀려나지 못함.
42. 결국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한 뒤 57세에 귀향할 수 있었음.
43. 정약용이 복귀한 다음 해, 능력이 있는 정약용을 다시 등용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서용보가 이것을 다시 저지하게 됨.
44. 정약용이 귀양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뽕나무 300그루를 심은 사람이 뽕나무에서 나오는 양잠으로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이 없이 산다는 것을 이야기해 줌.
45. 정약용은 뽕나무 사례를 들면서, 아들에게 "돈 버는 게 가장 중요하고 공부는 그다음이다" 라고 편지를 쓴 것임.
46. 과거에서 전국 2등으로 급제를 했지만, 오랜 귀양 생활 등 고생을 하다 보니 자식들에게 악착같이 공부해서 성공하라고 하지 않고, 편하게 살라고 이야기를 한 듯함.
47. 정약용이 귀양가 있던 18년 동안 자녀들에게 많은 편지를 남김.
48. 정약용이 자녀들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절대 서울에서 10리 이상 바깥으로 나가지 마라"라고 이야기함.
49. 인 서울을 목표로 하되, 당장 인 서울이 힘들면 서울에서 가까운 수도권 거주를 주장한 것임.
50. 이렇게 서울에 애착이 많던 다산 정약용은 서울 집값이 너무 올라서 귀향 복귀를 서울로 하지 못하게 됨.
51. 다산 정약용은 결국 집값이 싼 고향 남양주로 귀양에서 복귀할 수밖에 없었고, 인서울에 실패한 것에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고 함.
52. 남양주의 다산 신도시라는 명칭이 정약용에게는 그렇게 기분 좋은 이름이 아닌 듯도 한 이유임.
53. 당시 서울은 인구에 비해서 집이 많이 부족했음.
54. 훈련대장이었던 여연겸이라는 사람은 10칸짜리 집을 30칸으로 불법 개조해서 30집에 세를 주기도 함.
55. 매매가격이 350냥짜리 주택을 400냥에 전세를 주는 깡통전세 사기 사건도 벌어짐.
56. 깡통전세는 훈훈하게 마무리됨.
57. 서울의 집값이 계속 오르다 보니 전세금도 계속 올라가서, 전세금을 400냥 이상으로 올려 받아도 들어올 사람들이 넘쳐난 것임.
58. 요즘 발생하는 깡통전세 사기도 집값과 전셋값이 계속 올랐으면 사고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름.
59. "한양의 셋집에 동산 뜰이 비었더니, 해마다 울긋불긋 온갖 꽃이 피어나네."라는 말은 퇴계 이황 문집에 나오는 말임.
60. 퇴계 이황이 서울 셋집에 살던 전세 임차인이었듯이, 조선에 전세제도가 점점 보편화되기 시작함.
61.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한동안 나쁘지 않았음.
62. 임진왜란 이후 국가를 안정시켜야 했던 조선 입장에서 일본과의 군사 분쟁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음.
63. 일본 막부의 대빵인 쇼군이 즉위할 때마다 조선은 대규모 사신단을 보내서 축하를 해주는 등 일본을 다독거리는 일들을 계속함.
64. 일본도 조선 사신단 접대를 중요한 행사로 인식하는 등 양국은 내부의 감정과는 별개로 외형적으로는 우호국 관계가 한동안 유지됨.
65.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전함을 끌고 와서 일본의 개방을 요구했고, 이것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막부의 쇼군이 흔들리게 됨.
66. 형식적 존재였던 천왕을 얼굴마담으로 세운 하급무사들로 신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통지를 조선에 보내게 됨.
67.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있던 조선은 천황이라는 표현이 과한 점, 외교문서의 형식이 과거와 다른 점, 문서에 날인한 도장이 바뀐 점등을 들어서 정권교체 문서를 접수하지 않았고, 이 일을 중개한 쓰시마 번주가 수차례 일본의 정권 변화를 설명했지만 무시를 당하게 됨.
68. 천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일본 신정부 인사들은 천황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은 조선에 분개함.
69. 20년 전 미국의 전함에 강제로 당했던 것을 조선에 돌려주자는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배경임.
70. 정한론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면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점령하자는 주장이었음.
71. 신정부에는 실질적인 무력을 담당했던 하위계급 일본 무사들이 많이 남아있었음.
72. 이들은 칼부림 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고, 문서를 다루는 행정적인 일은 하지도 못하고 하기도 싫어했음.
73. 집단의 스트레스가 커지면 집단행동이 일어나기 마련임.
74. 온건파가 정권의 주류를 차지했던 일본은 이들 정한론을 외치는 무사집단을 한국이 아니라 대만으로 원정을 보냄.
75. 조선은 대일 강경파였던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강경파들이 주도세력이 됨.
76. 1875년, 일본은 전투함인 운요호를 조선으로 보내서 조선을 겁박하기 시작함.
77. 1875년 5월, 부산에 도착한 운요호는 조선 정부와 아무런 협의 없이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서 9월에는 강화도로 올라오기 시작함.
78. 결국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이것을 막는 조선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35명의 조선군이 전사하게 됨.
79. 당시는 강화도를 지나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배가 진입할 수 있었음.
80. 일본 전함이 한강으로 올라와 한양에 포격을 하면, 조선군이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조선 정부는 큰 충격을 받게 됨.
81. 조선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됨.
82. 1874년의 청나라는 미얀마를 둘러싼 영국과 마찰이 있었고,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교전이 벌어졌으며, 러시아와도 전쟁 직전까지 분쟁이 심해지는 시기라 조선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음.
83. 청은 전쟁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게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고, 일본과 조약을 권유하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게 됨.
84.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에서 회담을 열고, 합의를 하게 됨.
85. 주요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음.
-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현재 일본과 교역을 허용하고 있는 부산 초량 지역 외에 2곳의 교역 허용지역을 추가한다.
- 이곳에 일본인이 임차해서 가옥을 짓거나 기존 주택에 임시로 거주할 수 있게 한다.
-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범하면 일본에서 재판받게 하고, 조선인이 일본에서 죄를 범하면 조선에서 재판받게 한다.
- 조선은 섬과 암초가 많으므로, 일본 항해자들이 조선 해안을 측량해서 암초의 위치와 수심을 재고, 이것을 조선과 공유한다.
86. 외견상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불평등한 내용이 군데군데 숨어있었음.
87. 조선인이 일본에서 죄를 범할 일이 없었기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범하면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 재판하게 하겠다는 내용과 한국의 해안을 마음대로 측량하겠다는 내용 등이 숨겨져 있었음.
88. 기존 부산 초량 외에 추가된 2곳의 교역 허용지역은 인천과 원산이었음.
89. 합의 조항에는 교역 허용지역에 일본인이 땅을 임차해서 가옥을 짓거나, 기존 주택에 임시로 거주할 수 있게 허용하는 조항이 있었음.
90. 일본인들을 임차인으로 한 100일~1년짜리 전세 계약이 시작되었고, 조선 전체에 이 제도가 보편화되어 퍼져나감.
한 줄 코멘트. 과거 전국 2등 정약용도 부동산은 인 서울이 답이라고 주장함.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절대 서울에서 10리 이상 바깥으로 나가지 마라"라는 정약용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음. 원한을 잘못사면 평생을 고생함. 밟을때는 일어나지 못하게 확실하게 밟아야 뒤끝이 없음.
PS) 위 글을 읽고, 오늘 업로드될 1970년대의 전세제도 부활로 연결을 하면 스토리가 이어질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