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의 팜
한국 성장의 비밀 (feat 농지개혁,이승만,조봉암)

메르
2023.07.16
주말이라, 농지개혁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종합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제가 쓰는 글은 반복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다 보면 기존 글과 다른 점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번글은 정치적인 시각에 따라, 당시 상황을 다르게 볼 여지가 충분한 내용입니다.
다른 시각도 존중하며, 활발한 의견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1.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북한에는 소련이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옴.

2. 미군은 한국 내 일본재산을 몰수해서 미 군정 산하 신한공사로 이관함.
3. 미 군정은 일본인들로부터 빼앗은 재산중 농지부분을 그 땅을 경작하던 소작농들에게 할부로 넘겨 줌.
4. 매년 생산량의 20%를 국가에 내면 15년 후 자기 땅이 되는 조건이었음.
5. 그 당시 지주들은 산출물의 25%를 나라에 내면 되었지만, 소작농은 달랐음.
6. 조선 말기에는 지주와 소작농이 추수한 곡식을 반씩 가져가는 게 보통이었고, 여기에 씨앗 값, 소를 지주에게 빌린 값 등이 더해져서 생산량의 70% 정도를 지주가 가져가고, 소작농들은 굶어죽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함
7. 생산량의 70%를 소작료로 내던 소작농에게, 생산량의 20%를 15년간 내면, 내 땅이 되는 미 군정의 조건은 대박이었음.
8. 일본인 소유 땅들이 미 군정을 통해 소작농에게 불하되며, 농민의 24% 정도가 자기 땅을 가지게 되었고, 미 군정의 이미지도 좋아짐
9. 미 군정은 일본에서도 비슷한 농지개혁을 시행함.
10. 일본은 40년 치 소작료를 내야 그 토지가 소작농 땅이 되는 조건이었는데, 한국은 15년만 내면 되니, 한국의 조건이 훨씬 나았음.
11. 미 군정에서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은 울프 라데진스키로, 그는 소련에서 공산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음
12. 레닌과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 공산당이 적은 인원으로 소련을 먹은 데에는 농노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음.

13. 소련 공산당이 점령한 토지마다 지주에게 농지를 무상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분배를 하며 농민들을 한 편으로 만듦.
14. 농민들이 공산당을 열렬히 지지하니, 병력 보충과 식량보급이 쉽게 이뤄지며 소련 공산당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임.
15. 1940년대 한국도 무지막지한 소작료로 소작농들은 굶어죽지 않는 정도로 살아가고 있어 공산주의가 크기 쉬운 토양이었음.

16. 미 군정은 공산주의를 막는 방안으로 우선 일본인 소유 토지를 소작농에게 나눠주는 농지 개혁을 한 것임.
17. 일본인 소유 토지는 미 군정에 의해 소작농에게 분배가 되었지만, 아직 한국 지주 소유의 토지들이 남아 있었음
18. 이승만은 젊은 시절부터 농지개혁을 해야 민주주의가 이뤄진다고 이야기 해왔음.
19. 이승만이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 정책을 보면 "일본인이나 반역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해서 국유로 하고, 몰수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 농지개혁 법이 제일 먼저 제정될 것"이라고 하는 등 농지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였음.
20.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20대부터 30년간 계속된 해외생활로 한국에 재산이 없어서, 농지개혁에 개인적인 피해가 없기도 했음.
21. 당시 농지개혁에 가장 큰 반대세력은 한민당이었음.
22. 한민당의 지지기반이 지주들이었고, 한민당계 의원들 중에 대지주가 많아 농지개혁을 시행할 때 가장 큰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임.
23.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 장관에 무소속 조봉암을 발탁함.

24. 조봉암은 중학생 시절 3.1운동에 참여해서 1년간 투옥당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 직원으로 활동을 함.
25. 상하이 체류 중 경무국장이었던 김구의 휘하에 있었지만, 공산당 활동을 하며 사이가 멀어짐.
26. 조봉암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후, 모스크바의 동방 공산대학을 수료하고, 한국으로 돌아옴.
27. 귀국한 조봉암은 박헌영 등과 함께 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됨.
28. 조봉암은 일본에 의해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7년간 복역했고, 추운 날씨에 손가락 7개를 동상으로 잃는 등 고통을 겪으며 만기 출소를 한 정통 공산주의자였음.
29. 조봉암은 만기 출소 이후 경성으로 들어와 지하 노동단체 활동을 계속하다 1945년 1월 조선총독부에 다시 검거됨.
30.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조봉암은 감옥에서 풀려났고, 한국 총선거에 출마해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됨.
31. 당시 의회는 200석의 의석 중 이승만의 국민회(자유당)가 55석, 한국 민주당(한민당)이 29석이었고, 무소속이 많은 상황이었음.
32. 한민당이 무소속 의원들을 많이 흡수해 이승만의 국민회를 의원수에서 앞서며 실질적인 1당이 됨.
33. 의석수에 앞선 한민당은 의원내각제를 추진하였고, 이승만은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는 과정에서 긴장이 고조됨.
34.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지명한 것이었음.
35. 아무도 조봉암이 장관이 될지 몰랐고, 조봉암조차도 자기가 장관에 임명되는 것을 몰랐다고 함.
34. 조봉암은 무소속 의원들 72명을 모아서 무소속 구락부를 만들고 대표로 선출된 상황이었음.

1948년 8월 5일 열린 대한민국 첫 국무회의 모습. 왼쪽부터 민희식(교통), 전진한(사회), 안호상(문교), 김도연(재무), 장택상(외무), 이범석(국무총리 겸 국방), 이승만 대통령, 윤치영(내무), 임영신(상공), 이인(법무), 윤석구(체신), 조봉암(농림), 김동성(공보), 유진오(법제).[사진=신수용 대기자 DB]
35. 이승만은 조봉암에게 농지개혁을 맡긴 후, 실무책임자인 농지 국장에 조봉암의 지지자로 꼽히던 강진국을 임명하며 힘을 실어 줌.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최대 정적인 조봉암[사진= 신수용 대기자db]
36.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하자면, 정의당 당대표를 행안부 장관으로 파격적으로 발탁한 느낌이었을듯함.
37. 조봉암은 장관이 되자마자 평소 소신이던 농지개혁을 강하게 진행함.
38.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9천 평 이상 토지는 유상몰수해서 소작농들에게 연 30%로 5년만 납입하면 자기 땅이 되게 분배를 함.
39. 미 군정보다 더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전체 농지의 2/3가 해당되는 폭넓은 개혁이었음.
40. 이승만은 조봉암을 말리는 척하면서도,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 토지개혁을 해치워버리는 것을 허용함.
41. 1949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농지개혁법이 통과됨.
42. 조봉암에 대한 한민당의 미움은 대단했고, 전국 지주들의 저항도 장난이 아니었음
43. 한민당은 감찰위원회(현재 감사원)에 조봉암이 양곡매입비 500만 원을 관사수리와 회의비 등으로 썼다는 이유로 조봉암을 고발함.
44. 농지개혁법이 대의명분이 강하고, 당시 인구 비중이 높았던 농민들의 호응이 크자, 비리로 엮어서 조봉암을 공격한 것임.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들[ 사진= 신수용 대기자 db]
45. 감찰 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국회로 송부했고, 모든 영수증이 첨부돼 있어 부정은 없었지만, 용도와 다른 곳에 쓴 것은 맞다는 정도로 결론이 남.
46. 조봉암은 '현재 정부의 임시 예산 속에는 회의비나 출장비 등이 책정돼 있지 않아 양곡 매입 계몽에 관한 활동은 그와 유사한 양곡 매입 추진 위원회 비용에서 썼다. 관사 수리비는 국무회의에 보고한 뒤에 사용한 것이다. 단 한 푼도 개인적인 사용은 없다. '라고 반박한 후, 장관 자리에서 물러남.
47. 조봉암이 장관에서 물러나자, 이승만이 조봉암을 잘 쓰고 버린 결과가 됨.

제헌국회 속기록 첫장[사진=국회사무처 제공]
48. 국회는 이렇게 시끄러웠지만, 농민들은 알바가 없었고, 농지개혁으로 수혜를 입은 농민들이 보수화되며 이승만의 지지세력이 됨.
49. 국민의 71%가 농민이었고, 농민중 85%가 소작농이라, 전국민의 60%가 소작농이었던 시기에 실시한 농지개혁으로, 이승만은 1952년 대선에서 74% 득표율의 압도적 1위로 재선에 성공함.
50. 같은 해 열린 지방선거에서도 306석 중 이승만의 자유당이 147석을 얻은 반면, 한민당(민주국민당으로 변경)은 4석을 얻는데 그치며, 무소속(85석), 대한 청년단(34석), 국민회(32석)에도 뒤처지게 됨.

51. 향후 몇십 년 동안 도시는 야당, 농촌은 여당을 지지하는 여촌야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음.
52. 농지개혁전으로 돌아가면 지주계급은 한민당을 지지했고, 소작계급은 남로당을 지지하는 상황이었음.
53. 농지개혁을 통해서 두 당이 모두 몰락하고 이승만의 자유당이 선거에서 압승하는 결과로 끝이 난 것임.
54. 선악을 떠나서,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승만은 얻고 싶은 모든것을 얻게 됨.
55. 농지개혁으로 저가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주들에게는 일본인으로부터 압수한 적산 공장 불하 등 국가사업에 우선 참여권을 줘서 지주 자산이 산업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함
56. 1951년이 되자, 농지 1,958만 정보 중 1,800만 정보가 자영농 경작지로 바뀌게 됨.

(파란색이 전체, 붉은색이 자영농)
57. 농지개혁을 하자마자 6.25 가 터짐

58. 공산당이 내려와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을 무효로 하고, 지주 땅을 무상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분배를 한다고 발표를 함.
59. 외견상 이승만 정부는 유상 분배지만 공산당은 무상분배라 소작농 입장에서 좋아 보임.
60. 하지만, 공산당의 무상분배에는 문제가 있었음
61. 공산당은 농민들에게 토지 산출물의 27%를 세금으로 내게 하고, 애국미니 뭐니 하면서 50%를 공산당이 가져감.
62.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무상분배 받은 토지는 내 땅이 아니라 공산당 소유 땅을 빌려서 쓰는 것이 됨.
63. 농지를 내 소유로 유상분배 받은 남한 농민들 입장에서, 공산당의 무상분배는 말도 안 되는 제도로 보이게 됨.
64. 밀고 내려오기만 하면, 한국의 농민들이 소련처럼 대대적으로 공산당을 환영할 것이라는 김일성의 생각이 뒤틀리는 시점이었음.
65. 다만, 농지개혁에 혜택을 받은 집단은 소작농으로 머슴들은 달랐음.
66. 조선시대에는 노비와 머슴이 있었음.

67.노비는 정규직과 비슷하고 머슴은 계약직과 비슷함.
68. 조선말에 개혁으로 노비는 사라졌지만, 머슴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었음.
69. 머슴은 본인이 일하는 곳을 정할 수 있는 일종의 계약직이라 처우가 나쁘지는 않았음.
70. 머슴밥이라고 하는 말은 그들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머슴들에게 밥을 더 주고 대우를 잘 해줘야 다른곳에 가지않고 거느릴 수 있었다는 의미였음.
71. 중부지역 같이 산이 많고 넓은 평야가 없어 자그마한 땅이 여기저기 있는 곳에서는 중소 지주와 소작농 체제가 많았지만, 남부지역같이 넓은 평야가 있는 곳은 대지주와 머슴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음.
72.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은 자영농이 되는 혜택을 봤지만, 머슴들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해 불만이 쌓이게 됨.
72. 머슴들은 625전쟁으로 공산당이 내려와 무상배분을 할때 혜택을 많이 보게 되었고, 공산당의 주요 지지세력이 될 수 있었음.
73. 한국에서 인민재판이 심하게 일어난 지역이 주로 대지주에 머슴 비중이 많았던 평야 지역이었던 이유이기도 함.

74. 한국만 토지개혁이 진행된 것은 아님.
75. 일본은 미국에서 패망한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토지개혁이 진행됨.
76. 미군정은 1 헥타르(가로 100미터 * 세로100미터)가 넘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을 유상몰수 대상으로 설정하고 강제로 매수함.
77.그당시 일본 농부중 70%가 소작농이었는데, 1949년이 되자 소작농 비율이 45%로 떨어져서 절반이상이 자작농이 되게 됨.
78. 대만은 중국 공산당에게 패하고 대만으로 들어온 국민당정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했음.
79. 국민당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논 3 헥타르 or 밭 6 헥타르)를 보유한 지주들에게 농지를 매각토록 하고,매각 대금의 70%는 토지증권으로, 30%는 정부가 소유한 공장의 주식으로 지불을 한 후, 소작농에게 유상 분배를 함.
80. 대만의 토지개혁은 점령군 같이 행세해서 국민당에 좋지 않았던 민심을 긍정적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함.
81. 그 당시 공산진영이 아닌곳에서 토지개혁이 이뤄진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 일본, 대만 3국이었음.
82. 북한과 중국의 무상몰수,무상분배는 무상 분배한 토지가 개인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가 되어 인간의 소유욕을 자극하지 못했음.
83. 필리핀과 인도는 지주들의 반발로 토지개혁에 실패했고, 남미는 지주세력이 워낙 커서 토지개혁 자체를 시도하지 못함.
84. 6.25가 끝난 후 농지를 받은 농민들은 과거보다 남는 재산 여력을 자식 교육으로 돌림
85.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1949년 도입하자, 초등학교(국민학교) 진학률은 45년 51%에서 60년 98%로 높아짐.

86. 당시 정부는 예산이 부족해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이 한계였음.
87.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사립학교를 키워서 대응함.
88. 교육기관 땅을 농지개혁 대상에서 제외해 줘서, 지주들이 농지개혁으로 땅을 헐값에 뺐기느니 그 땅에 학교를 세우게 만듬.
89. 농지개혁이후 39개이던 중학교가 424개까지 늘어나고, 하나도 없던 사립 고등학교가 245개까지 설립되는 등 교육기반이 확보됨.
90. 당시는 30대가 장관이 되던 시절이라 옆집 똘똘한 자식이 대학을 졸업하자 군수로 내려오는 개천에 용 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짐.
91.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좋은 투자가 자식 교육이 된 것임

92. 농민들의 교육열로 대량 공급된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한국이 급성장하는 '한강의 기적'에 기초가 됨
한 줄 코멘트. 회사일을 하다보면, 인성에 하자가 있는 사람이 일은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음. 반대로, 성품도 좋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일은 참 갑갑하게 진행하는 것도 많이 봄. 둘 다 갖춘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지만,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때가 문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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